맨위로가기

클라렌스 애슐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클라렌스 애슐리는 미국의 포크 음악가로, 1895년 테네시주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대 초 가족과 떠돌이 음악가들로부터 음악을 배우며, 1928년 첫 음반을 녹음했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음악 활동이 어려워진 후, 1950년대 후반 포크 음악 부흥기에 재조명받아 1960년대 여러 포크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애슐리는 "뻐꾸기", "해돋이 집" 등 다양한 곡을 녹음했으며, 닥 왓슨, 제리 가르시아 등 여러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67년 사망했으며, 2013년 그의 앨범이 국립 녹음 등록소에 추가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국의 밴조 연주자 - 에드 헬름스
    에드 헬름스는 《더 데일리 쇼 위드 존 스튜어트》 특파원, 《오피스》의 앤디 버나드 역, 영화 《행오버》 시리즈의 스투 프라이스 역으로 유명한 미국의 배우, 코미디언, 음악가이며, 블루그래스 밴드 활동과 음악 블로그 운영, 사회 참여 활동도 하고 있다.
  • 미국의 밴조 연주자 - 피트 시거
    피트 시거는 알마낙 싱어즈와 더 위버스의 창립 멤버로서 노동, 시민권, 반전 운동 등 사회 문제에 참여하며 평화와 사회 정의를 옹호하고 허드슨 강 환경 보호 운동을 이끈 미국의 포크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이다.
  • 테네시주 출신 음악가 - 티나 터너
    로큰롤의 여왕으로 불리는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 티나 터너는 아이크 터너와 듀엣 및 솔로 활동으로 성공을 거두며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고 그래미상을 12번 수상하는 등 음악적 업적을 이루었으며, 1970년대 불교로 개종 후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 테네시주 출신 음악가 - 부커 T. 존스
    부커 T. 존스는 멤피스 소울 사운드의 선구적인 미국의 뮤지션, 작곡가, 프로듀서로서 부커 T. 앤드 더 MGs의 멤버로 활동하며 스택스 레코드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솔로 아티스트 및 프로듀서로서도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며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 1967년 사망 - 김창영 (1890년)
    김창영은 일제강점기 경찰 및 관료, 만주국 관리로서 항일 무장 세력 탄압과 귀순 공작에 참여하고 금산군수와 전라남도 참여관을 지냈으며, 광복 후 경성부부윤을 역임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벌받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1967년 사망 - 김학규 (1900년)
    김학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군인, 정치인으로, 3·1 운동 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독립운동에 참여, 한국 광복군 창설에 기여했으며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나 본관, 출생년도, 친손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클라렌스 애슐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클라렌스 애슐리, 캐롤라이나 타르 힐스의 멤버
애슐리가 캐롤라이나 타르 힐스의 멤버였을 때
본명클래런스 얼 맥커리
다른 이름톰 애슐리
토머스 C. 애슐리
출생일1895년 9월 29일
출생지테네시 주 브리스톨
사망일1967년 6월 2일
사망지노스캐롤라이나 주 윈스턴-세일럼
악기밴조
기타
장르포크 음악
직업음악가
활동 기간1928년 ~ 1943년 (추정)
1960년 ~ 1967년
레이블제네트
컬럼비아
ARC
포크웨이즈
과거 멤버캐롤라이나 타르 힐스
헤이우드 카운티 램블러스
블루 리지 마운틴 엔터테이너스

2. 생애

2. 1. 초기 생애 (1895-1910)

클라렌스 애슐리는 1895년 테네시주 브리스톨에서 클라렌스 얼 맥커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조지 맥커리와 로즈-벨 애슐리였으며, 외동아들이었다. 조지 맥커리는 "외눈박이 바이올린 연주자, 악동, 허풍쟁이"로 묘사되었다.[2] 클라렌스가 태어나기 직전, 로즈-벨의 아버지 이녹 애슐리는 조지가 간통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조지는 마을을 떠나야 했다. 로즈-벨은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고, 1900년경 가족은 이녹이 하숙집을 운영하던 테네시주 마운틴 시티 남쪽의 션스로 이사했다.[3]

클라렌스는 어릴 때 할아버지 이녹으로부터 "토미 티디 와디"라는 별명을 얻었고,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톰'으로 알려졌다. 어머니의 부모에게 키워졌기 때문에 "맥커리"라는 성 대신 "애슐리"로 불리게 되었다.[3] 톰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밴조를 선물 받았고, 어머니와 이모들로부터 전통적인 애팔래치아 민요와 발라드를 배웠다. 또한, 할아버지의 하숙집에 머물던 떠돌이 벌목꾼과 철도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노래와 기술을 배웠다.[4]

262x262px

2. 2. 약장수 쇼와 음악 활동 (1911-1927)

클라렌스 애슐리는 1895년 테네시주 브리스톨에서 클라렌스 얼 맥커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조지 맥커리와 로즈-벨 애슐리의 외동아이다. 조지 맥커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외눈박이 바이올린 연주자, 악동, 허풍쟁이"로 묘사했다.[2] 클라렌스가 태어나기 직전, 로즈-벨의 아버지 이녹 애슐리는 사위 조지가 간통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지는 마을을 떠나야 했고, 로즈-벨은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1900년경, 가족은 이녹이 하숙집을 운영하던 테네시주 마운틴 시티 바로 남쪽에 있는 교차로인 테네시주 션스로 이사했다. 클라렌스는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 이녹으로부터 별명인 "토미 티디 와디"(동요에서 따옴)라는 별명을 얻었고,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어머니의 부모에게 키워졌기 때문에 "맥커리"라는 성은 버리고 "애슐리"로 불리게 되었다.[3]

톰은 어릴 때부터 음악가들과 교류했다. 할아버지는 그가 여덟 살 때 밴조를 사주었고, 그의 어머니와 이모들은 그에게 전통적인 애팔래치아 민요와 발라드를 가르쳤다. 그는 할아버지의 하숙집에 머물던 떠돌이 벌목꾼과 철도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노래와 기술을 배웠다. 1911년, 톰은 마운틴 시티를 지나가던 약장수 쇼에 합류했다. 그는 밴조와 기타를 연주하고 블랙페이스 코미디를 공연했다.[4] 1940년대 초까지 매년 여름 약장수 쇼에서 연주했다. 겨울에는 시골 학교에서 지역 콘서트를 조직했다. 그는 또한 영향력 있는 존슨 카운티 바이올린 연주자 G. B. 그레이슨과 함께 석탄 캠프와 레이온 공장에서 돈을 받고 연주하기도 했다.[2]

2. 3. 음반 녹음과 대공황 (1928-1937)

1928년 2월, 톰은 제네트 레코드사(Gennett Records)에서 블루 리지 마운틴 엔터테이너스(Blue Ridge Mountain Entertainers)와 함께 첫 녹음을 했다. 이 밴드는 애슐리가 밴조 또는 기타를 연주하고, 갈리 포스터(Garley Foster)가 하모니카를, 클라렌스 호턴 그린(Clarence Horton Greene)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3] 그 해 말, 빅터사의 프로듀서 랄프 피어(Ralph Peer)의 도움을 받아 애슐리는 캐롤라이나 타르 힐스(The Carolina Tar Heels)와 여러 곡을 녹음했는데, 이 밴드는 톰이 기타와 보컬을 맡고, 그의 친구 독 월시(Dock Walsh)가 밴조를, 웬 또는 갈리 포스터가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1929년, 컬럼비아 레코드사(Columbia Records)의 프랭크 버클리 워커(Frank Buckley Walker)는 애슐리를 오디션에 참여시켜 첫 솔로 녹음을 하도록 했으며, 존슨 시티 세션(Johnson City Sessions)에서 "버드 무어 앤 히스 핫 샷츠"(Byrd Moore and His Hot Shots)라는 트리오와 함께 녹음하도록 했다. 1930년대 초, 애슐리는 다시 블루 리지 엔터테이너스와 함께 녹음했는데, 이번에는 아메리칸 레코드 코퍼레이션(American Record Corporation)을 위해 녹음했다. 그의 초기 시대의 마지막 녹음은 1933년 하모니카 연주자 웬 포스터와의 듀엣 시리즈였다.[2]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영향으로 1930년대 초반에는 돈이 부족해졌다. 애슐리는 더 이상 음반을 만들도록 섭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탄광 캠프나 길거리에서 연주하여 돈을 버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대공황은 또한 약장수 쇼에 참석하는 군중을 크게 줄였다. 애슐리는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에서 잠시 석탄 광부로 일했으며, 그의 아내 헤티와 두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숀스에서 잡일을 했다. 1937년, 그는 마운틴 시티에 가구와 농작물을 이 지역의 여러 도시로 운송하는 트럭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10년 동안 애슐리는 스탠리 형제와 함께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다. 그는 지역 현악 밴드인 테네시 메리메이커스(Tennessee Merrymakers)를 결성했다.[2]

2. 4. 포크 음악 부흥과 재조명 (1937-1967)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의 포크 음악 부흥기 동안, 도시 민족음악학자들이 애슐리의 음악을 재발견했다. 해리 스미스의 ''미국 민속 음악 선집''(1952)에 애슐리의 초기 녹음 몇 곡이 포함되면서 포크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2] 1960년, 랄프 린즐러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유니언 그로브에서 열린 올드 타임 피들러 컨벤션에서 애슐리를 만나 밴조 연주와 녹음을 설득했다. 이후 애슐리는 닥 왓슨, 클린트 하워드, 프레드 프라이스 등과 함께 1962년 시카고 포크 페스티벌, 1963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을 포함한 여러 도시 포크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2]

애슐리는 1960년대 중반에도 포크 서킷 투어를 계속했다.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공연하고 캘리포니아의 수십 개 공연장에서 연주했다.[3] 1966년, 노스캐롤라이나주 리즈빌의 기타리스트 텍스 아이슬리와 영국 투어를 했다.[3] 1967년 두 번째 영국 투어가 계획되었지만, 애슐리는 출발 전 암 진단을 받았다.[3] 1967년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세일럼의 침례 병원에서 사망했다.[5]

2013년 3월, 미국 의회 도서관은 앨범 ''클라렌스 애슐리의 올드 타임 음악''이 국립 녹음 등록소에 추가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앨범은 랄프 린즐러가 1960년대 초에 녹음한 애슐리와 밴드 멤버들 닥 왓슨, 클린트 하워드, 프레드 프라이스, 가이더 칼튼, 토미 무어가 연주한 포크송 모음집이다.[6]

3. 음악적 스타일과 영향

애슐리는 1900년대 초 그의 할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할아버지의 하숙집에 묵던 떠돌이 음악가들로부터 레퍼토리를 많이 배웠다.[1] 그가 "제재소"라고 불렀던 독특한 G 모달 튜닝 스타일(5번 줄에서 1번 줄까지 gDGCD)은 가족들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2][3] 그는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대대로 내려온 영어 또는 아일랜드 발라드에서 파생된 여러 곡들을 녹음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곡으로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뻐꾸기 새", "집주인", "거칠고 방랑하는 남자" 등이 있다.[2] 다른 녹음에는 살인 발라드 "나오미 와이즈", "리틀 세이디", "존 하디", 민요 "프랭키 실버스", "그린백 달러" 등이 포함되었다. 애슐리가 부른 "다크 홀러", "유령의 길 블루스", "코리나, 코리나"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향을 들을 수 있다. 1933년 애슐리는 "해돋이 집"의 최초 녹음을 했는데, 그는 이 곡을 외할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포크 리바이벌 시대에 애슐리와 그의 밴드는 18세기 영국 남부 찬송가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2]

애슐리는 여러 유명 음악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로이 애큐프는 한때 애슐리와 함께 약장수 쇼에서 일했으며, 애슐리는 그에게 "해돋이 집"(애큐프는 1938년에 이 곡을 녹음했다)과 "그린백 달러"를 가르쳤을 것이다.[2] 포크 음악가 닥 왓슨은 1960년 애슐리와 함께 녹음 경력을 시작했고, 그 십 년 동안 대부분 애슐리의 밴드에서 연주했다. 그레이트풀 데드의 프론트맨 제리 가르시아는 한 인터뷰에서 "클라렌스 애슐리의 연주를 들으면서" 클로해머 피킹을 배웠다고 말했다. 애슐리에게 영향을 받은 다른 포크 음악가로는 조안 바에즈, 주디 콜린스, 진 리치 등이 있다.[2]

4. 유산

클라렌스 애슐리는 1900년대 초 그의 할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할아버지의 하숙집에 묵던 떠돌이 음악가들로부터 많은 레퍼토리를 전수받았다.[1] "제재소"라고 불린 독특한 G 모달 튜닝 스타일(5번 줄에서 1번 줄까지 gDGCD)은 가족들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2][3] 그는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대대로 내려온 영어 또는 아일랜드 발라드에서 파생된 "뻐꾸기 새", "집주인", "거칠고 방랑하는 남자" 등을 녹음했다.[2]

그는 또한 "나오미 와이즈", "리틀 세이디", "존 하디", "프랭키 실버스", "그린백 달러" 등의 민요와 살인 발라드를 녹음했다. 애슐리가 부른 "다크 홀러", "유령의 길 블루스", "코리나, 코리나"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1933년에는 "해돋이 집"을 최초로 녹음했으며, 이 곡은 외할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1960년대 포크 리바이벌 시대에는 18세기 영국 남부 찬송가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2]

애슐리는 여러 유명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로이 애큐프는 애슐리와 함께 약장수 쇼에서 활동하며 "해돋이 집"(1938년 녹음)과 "그린백 달러"를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2] 포크 음악가 닥 왓슨은 1960년 애슐리와 함께 녹음 경력을 시작했고, 1960년대 대부분 애슐리의 밴드에서 연주했다. 그레이트풀 데드제리 가르시아는 "클라렌스 애슐리의 연주를 들으면서" 클로해머 피킹을 배웠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조안 바에즈, 주디 콜린스, 진 리치 등도 애슐리의 영향을 받은 포크 음악가들이다.[2]

참조

[1] 서적 Clarence Tom Ashley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2] 간행물 Tom Ashley
[3] 웹사이트 Clarence Tom Ashley Biography (2007) http://www.clarencea[...] 2007-06-26
[4] 서적 Clarence 'Tom' Ashley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5] 웹사이트 Ashley obituary http://www.clarencea[...] 2011-07-08
[6] 웹사이트 The National Recording Registry 2012 https://www.loc.gov/[...] 2013-03-2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